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드 대왕 (문단 편집) === 군사적 업적 === 알프레드의 조부인 [[브리튼왈다]][* [[브리튼 섬]]의 대왕(大王). [[칠왕국]]의 [[패자]](覇者) 정도 뜻이다.] [[에즈베르흐트]] 왕은 [[웨식스]] 왕국을 브리튼 섬의 패자로 만든 최초의 인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 섬 대부분을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8세기]] 말부터 데인족 [[바이킹]]이 침략해오면서 웨식스 왕국은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시달렸으며, [[9세기]] 중반부터는 도둑 떼 수준을 넘어 아예 [[이교도 대군세|정규군 수준의 병력]]으로 쳐들어 와서 브리튼 섬을 약탈했다.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웨식스 왕국은 사실상 패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알프레드 즉위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즉위 초반 그는 바이킹 침략군들에게 연전연패하면서 계속 도망다니기 바빴으며 [[런던]], [[캔터베리]] 등 다수의 요충 지역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이 위기상황에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는데, 도망다니는 중에도 지역의 군소 영주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적인 바이킹에 대항하자는 공감대를 얻어냈으며, 이를 통해 주요 전략지에 [[요새]]를 세우고, [[상비군]]을 편성했다. 이런 군사적 [[인프라]] 확충을 통해 반격에 나선 알프레드는 878년 5월 6~12일에 드디어 월트셔(Wiltshire) 지역의 에탄던(Ethandun, 현재는 에딩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데인족 수장 [[구스룸]](Guthrum)[* 879년에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나 당연히 그는 색슨족이 아니라 데인족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의 마지막 왕 에드문드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구트룸은 사실 당대에도 데인족 사이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피정복지인 잉글랜드의 체계와 종교에 관심을 두었고, 바이킹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그는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세력을 갖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이 될 수 있었다.]이 이끄는 바이킹 부대를 박살내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 승리에 고무된 알프레드는 차례로 바이킹의 점령지를 무너뜨렸으며 [[886년]]에는 바이킹의 손아귀에 있던 런던을 탈환하였다. 런던 탈환 이후 다년간의 전쟁에 지친 웨식스와 바이킹은 886년 웨드모어 조약을 맺고 상호 군사행동을 멈추었다. 런던을 포함한 브리튼 남서쪽 및 머시아 서쪽은 웨식스가 차지하고, 머시아 동쪽 및 동앵글리아는 데인족에게 할양하는 조약이었다.[* [[구스룸]]은 에딩턴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여전히 바이킹의 세력은 건재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그가 자신을 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구스룸]]의 동앵글리아 지배를 인정했다. [[구스룸]]은 동앵글리아의 왕이었으나 머시아 동부 역시 그의 영토였는데, 다만 [[노섬브리아]]의 경우는 별도의 바이킹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때 데인족이 가지게 된 지역을 소위 [[데인로]](Danelaw) 또는 데인랜드(Daneland)라고 했는데, '데인로'라는 명칭은 데인인의 법으로 통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였던 반면 데인로의 주축 지역이었던 [[머시아]]와 [[동앵글리아]] 등에서는 자영농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 웨드모어 조약은 항구적인 평화조약이 아나라 일종의 휴전이었기 때문에 알프레드 이후에도 바이킹은 계속 웨식스의 영역을 넘보았으며, 웨식스는 웨식스대로 바이킹에게 내준 지역을 탈환하는데 골몰하게 된다.[* 중세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생산력에 한계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 살았던 바이킹들은 인구가 늘어나면 근처의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여 물자와 영토를 약탈하거나 배를 타고 해적질을 해야 했다. 그나마 평화적인 해결책은 식민 활동을 통해 부족 일부나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왔다가 가면 약탈이요, 와서 눌러앉으면 식민인데 말이 식민이지 그냥 [[정복]]이다. 평화로운 게 아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상대적으로 가깝고 토질도 비옥한 데다 확실한 정치세력도 없었던 [[브리튼 섬]]은 바이킹들에게 최적의 식민 대상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바이킹과 웨식스 간에는 계속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웨식스의 주축을 이루었던 앵글로색슨인들도 원래는 [[유틀란트 반도]]와 북독일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며, 브리튼에 건너와서 토착세력이었던 [[브리튼인]]들을 서쪽 고지대로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앵글로색슨인은 이민 분야에서 바이킹들의 대선배이자 롤모델인 셈이었다.] 알프레드 생전인 [[890년]]에도 바이킹이 웨식스로 쳐들어와서 무려 4년 동안이나 잉글랜드 전역을 시계 방향으로[* 템즈 강-웨식스-머시아-동앵글리아-런던 근교] 돌면서 쫓겨다니기도 했다. 이때 후계자인 [[대 에드워드]]가 데뷔하면서 군재를 쌓은 것은 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